누가복음 11장 33-36절에서 예수님은 ‘등불’과 ‘빛’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말씀을 하셨고(33절), 그 다음 절에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34절). 눈이 ‘몸의 등불’인 이유는 눈이 어두우면 낮이라도 어두운 밤길을 등불 없이 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절에서는 사람의 ‘속에 있는 빛’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절). ‘속에 있는 빛’이 무엇일까요? 영혼을 비추는 빛, 영적인 빛을 말합니다. 이 빛은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빛이 밝으면 영안이 밝은 것이고, 이 빛이 어두우면 영안이 어두운 것입니다.
그 다음 절은 이렇습니다.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36절). 여기서 ‘온 몸’은 육체와 영혼을 말합니다. ‘온 몸이 밝다’는 말은 육체와 영혼의 눈이 다 밝은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육체의 눈도 밝아야 하지만 영혼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육체의 눈은 밝았지만 영혼의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다음 절부터 바리새인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드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37-38절). 이상하게 생각한 이유는 위생적으로 불결해서가 아니라, 정결의식을 하지 않고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각을 아시고 예수님은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의식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속이 정결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의식을 행했지만 그들의 속은 전혀 정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속이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했지만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속을 들여다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속을 보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b).
이어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40-41절). 겉만 깨끗하게 하지 말고, 속도 깨끗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도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마 15:18-20).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속을 잘 관리하려면 속을 잘 볼 수 있어야 하고, 속을 잘 보려면 영안이 밝아야 합니다. 41절은 ‘구제를 하면 속이 깨끗해진다’는 말처럼 보이는데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41절의 ‘구제’는 ‘탐욕’의 반대 개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속에 ‘탐욕’이 가득했던 이유는 그들의 영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어두운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탐욕입니다. 삭개오(눅 19장)가 그에 대한 좋은 예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돈밖에 몰랐고 돈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영안이 열리고 ‘구제’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눅 19:8). 나는 영안이 밝은 사람인지 어두운 사람인지 알려면 재물에 대한 나의 생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빛’이 밝은지 어두운지 늘 살피면서 영안이 밝은 사람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