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7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말해줍니다. 첫째는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1a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좋은 향수를 뿌리는 것보다 좋은 사람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몸에서 좋은 향수 냄새가 나면 참 좋습니다. 그런데 향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못된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인품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그런 경우라면 그 사람 곁에도 가기 싫을 것입니다. 향수 냄새조차도 역겹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향수 냄새를 풍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에서 향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명품 옷이나 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명품 옷을 입고 명품 가방을 들었어도 사람이 형편없다면 그 명품은 ‘돼지 코에 금 고리’(잠 11:22)일 뿐입니다. 명품 물건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명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데 운전매너는 꽝입니다. 그런 사람은 좋은 차를 타기 전에 운전매너부터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쁜 집에서 사는 사람이 동네 사람들에게 욕먹을 짓이나 하고 다닌다면 예쁜 집에서 사는 것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은 외형보다 됨됨이가 중요합니다. 바나바에 대해서 성경은 ‘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행 11:24).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눈에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요?
둘째는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1b절)는 것입니다. 죽는 날이 좋은지 출생하는 날이 좋은지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출생하는 날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죽는 날은 인생의 모든 수고와 슬픔이 끝나는 날이고 출생하는 날은 인생의 모든 수고와 슬픔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90편 10절에 의하면 인생은 ‘수고와 슬픔’의 연속입니다. 수고와 슬픔이 언제 끝납니까? 죽을 때 끝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복이라 했고 죽음 뒤에는 쉼이 있다고 말씀합니다(계 14:13). 이런 이유 때문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쉼이요 잠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도 싫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을 못 자도록 누가 방해한다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그와 같습니다.
셋째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2a절)는 것입니다. 초상집에 가면 슬퍼하는 사람들을 봐야 하고, 잔칫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고 즐겁게 놀 수도 있기 때문에 잔칫집에 가는 것이 초상집에 가는 것보다 나을 것 같은데 성경은 반대로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초상집에 가면 죽음을 생각하면서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게 되지만 잔칫집에 가면 먹고 마시고 노는 것 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배울 것도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2b절). 그래야 더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초상집과 잔칫집에 갈 일이 동시에 생긴다면 어디를 가야하겠습니까? 초상집에 가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지혜입니다. 전도서 7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