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있을 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 단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건물 로비에 들어서자 불쌍하게 생긴 유대인 남자의 얼굴모습 부조(浮彫)가 눈에 들어왔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예레미야애가 1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구절의 나머지 부분은 이렇습니다.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애 1:12b).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을 의인화해서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서 한 말입니다. 자비와 긍휼을 구했지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자비와 긍휼은 고사하고 유다가 멸망한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애 1:21a). 특히 에돔이 그랬습니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시 137:7). 참으로 고약한 이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관계가 안 좋았다 해도 고통당하면 불쌍히 여겨주고 도와주는 것이 도리인데 에돔과 유다의 주변 국가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키신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애 1:14). ‘예루살렘이 감당할 수 없는 자’는 바벨론을 말합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죄악’을 범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렘 25:2-9). 유다가 멸망한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멸망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벧후 3:9). 하나님을 떠난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멸망하지 않는데,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멸망하는 것입니다(요 16:9).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다가 70년 뒤에 다시 회복됩니다. 그랬다가 몇 백 년 뒤에 다시 로마에 의해 멸망합니다. 로마에 의해 멸망한 이유도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계로 흩어져서 2천 년 가까이 고통을 당했는데, 그들의 고통이 우리와는 관계가 없을까요?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애 1:12a)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 때문에 고통당했다면 그들의 고통은 우리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외형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사 53:5). 그렇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의 잘못 때문에 그들은 벌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것을 원하고 있고,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창 12:3). 전쟁 중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과 전쟁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창 21:1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