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표적에 의존하는 믿음이 있고 말씀에 의존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둘을 대조적으로 잘 보여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4장 43-54절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가고 계셨습니다(43절).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선지자는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44절). 예수님이 자란 고향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해주었습니다(45a절).
예수님의 예측이 빗나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영접’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한 영접이기 때문에 참된 영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한 것이 아니라 ‘기적 행하는 사람’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이런 영접, 이런 믿음은 참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요 2:23-25). 갈릴리 사람들의 믿음은 표적에 근거를 둔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저차원적인 믿음이고, 예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48절).
오늘날에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이적과 기사는 사도 시대에, 즉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주신 은사이지 항상 있는 은사가 아닙니다. 성경을 잘 보면 그런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표적과 기사의 은사가 나오는데, 2년 정도 뒤에 기록된 로마서 12장에는 다른 은사들은 언급하면서 표적과 기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 년 더 뒤에 기록된 히브리서 2장 3b-4절에는 표적과 기사가 과거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간이 가면서 그런 은사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적과 기사를 추구한다면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이고, 과거에 얽매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물보다도 사진을 더 좋아하는 것과 같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표적과 기사를 추구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추구하는 믿음입니다.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왕의 신하’가 그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46-47절). 왕의 신하는 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가버나움으로 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의 거리는 30km입니다. 그 아버지의 요청에 예수님은 “가시오, 당신의 아들은 살 것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49-50절). 가다가 자기 종들을 만났는데, 종들의 말을 들어보니 아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각에 나았습니다(51-53절).
‘왕의 신하’의 믿음은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입니다. ‘표적에 의존하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에 의존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본받아야 할 믿음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표적을 구하지 말고,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