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장 1-13절에는 오순절 날 성령이 처음으로 임한 것과 성령 받은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은 구약성경의 칠칠절과 같은 절기입니다. ‘칠칠’은 일곱 날이 일곱 번이라는 말이고, 거기에 하루를 더하면 50일이 됩니다. ‘오순(五旬)’은 50이라는 말입니다. 오순절을 맞이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각지로부터 예루살렘에 와 있을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보이면서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했습니다(1-3절). 그런 방식으로 임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고(4절) 그것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5-8, 12절). 제자들은 다른 나라에 가본 적도 없고,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운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한 말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11절).
배운 적이 없는 언어를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역사로 갑자기 하게 된 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는데,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려면 언어가 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방언의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은 방언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전도 목적이 아닌 기도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랬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 이 말씀은 방언의 성격이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방언으로 기도했고 방언으로 기도하니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하기보다 예언을 하라고 했습니다(고전 14:1, 5, 9).
고린도전서 14장 14절을 봐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방언으로 기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은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바로 앞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고전 14:13)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방언에 대해 말한 이유는 방언을 장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방언을 자제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19, 23절). 자제시키려고 한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방언을 잘못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기도가 아니라 전도입니다(고전 14:22). 방언은 이 땅에 있는 언어였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행 2:4, 11).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14장 2절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고린도전서 14장 2절의 의미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언어를 모르는 사람은 못 알아듣는다는 말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장이 보여주듯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방언을 말했는데 오늘날은 어떨까요? 오늘날에도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사도시대에 일시적으로 있다가 지금은 사라졌습니다(고전 13:8, 히 2:4).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을 하려고 하기보다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