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편은 익명의 한 시인이 악한 자를 벌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1절에서 시인은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새번역)라고 말합니다. 고난 중에서 우리도 이렇게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잠시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지 숨어 계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당하는 그 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2절에서 시인은 악한 자로 하여금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3-4절에서는 악인이 자기 마음에 있는 욕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악인이 하는 일은 언제나 잘 되고, 주님의 심판은 너무 멀어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으니, 악인은 오히려 그의 대적을 보고 코웃음만 칩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내가 망하는가, 두고 봐라. 나에게는 언제라도 불행과 저주란 없다’ 하고 말합니다”(5-6절, 새번역). 악을 행해도 벌이 임하지 않으니 마음 놓고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전 8:11). 악인들은 말도 함부로 합니다. “그들의 입은 기만과 폭언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혀 밑에는 욕설과 악담이 가득합니다”(7절, 새번역).
8-10절은 악인이 가련한 자를 사냥하는 내용입니다. 악인은 자기의 욕망을 위해 연약한 사람들을 삼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성폭행하기 위해 지나가는 여자에게 돌려차기를 하지 않나, 죽이기를 하지 않나…. 악인이 악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11절). 그런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열매 따먹는 것도 보셨고, 가인이 아벨 죽이는 것도 보셨습니다. 다윗이 죄 짓는 것도 보셨고, 우리가 죄 짓는 것도 보고 계십니다(잠 15:3). 12절에서 시인은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해 주시고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힘없는 자들, 고난당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13절에서 시인은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는데도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문은 우리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면 바로 벌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서러움, 이 억울함을 당신은 보셨습니다. 손수 그들을 붙들어주시니 당신은 가엾은 자들의 의지이시며 고아들의 도움이시옵니다”(공동번역).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돕고 계셨습니다. 시인이 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계시고 돕고 계십니다. 15절에서 시인은 ‘악인의 팔을 꺾어주시고, 악을 샅샅이 찾아서 벌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악한 사람을 보면 이런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16절에서는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기 때문에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했다고(사라졌다고) 말합니다. 어떤 성경은 미래형을 써서 ‘멸망할 것이다(사라질 것이다)’로 번역했습니다. 번역을 과거형으로 했던 미래형으로 했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악인을 사라지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니 참 감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들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또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편 10편을 마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고아와 억눌린 사람을 변호하여 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억압하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17-18절, 새번역). 이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